간단하게 끝날 것이라 기대했던 이혼 과정이 지리멸렬한 법정 싸움으로 비화되고 과격해진 비방전이 오간 다음, 찰리(아담 드라이버)와 니콜(스칼렛 요한슨)은 단둘이 만난다. 뭔가 이건 아니다 싶어 변호사 없이 만난 것이지만, 서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속엣말을 마구 쏟아놓는다. 그러다 감정이 극도로 격해진 찰리가 니콜의 면전에 대고 “아이만 괜찮다면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극언까지 내뱉고 만다. 그 직후 찰리는 자기가 내뱉은 말에 스스로 무너져내린다. 좌절감과 자기 모멸감에 무너지는 그를 니콜이 다가와 가만히 안아준다. 그런 극언이 오간 직후에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서로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니콜은 찰리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찰리는 니콜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안다. 그들의 (이제 곧 공식적으로 끝나게 될) 결혼 생활이 그것을 증명해왔기 때문이다.
죽었으면 좋겠어, 라는 식의 극단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부부싸움을 하다 감정이 격해져서,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와 버린 적이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그러고는 곧장 그런 말이나 행위를 한 자기 모습에 모멸감을 느껴본 경험도 있지 않을까. 엉엉 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부끄럽고 상대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감정.
그런데 그런 순간이 해법이 되기도 한다. 진심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되는 말인데, 서로에게 비수를 꽂을 정도로 우리가 저질이 되었나, 하고. 이게 이렇게까지 바닥을 보여야 할 싸움인가. 그래서 종종 그 대목에서 울음이 터지거나 쭈뼛한 사과의 말이 나오고, 서로를 안으며 화해와 이해의 단계로 넘어가기도 한다. 물론 부부 사이에 사랑과 믿음, 또 세월과 함께 쌓아온 정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찰리와 니콜은 아이의 양육권을 두고 바닥까지 내려온 상태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애틋함을 끝내 지켜낸다. 찰리와 니콜이 그렇다는 것은, 영화가 시작될 때 서로의 장점을 한가득 써낼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처음 사랑할 때의 그 설렘은 이미 사라졌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함께 삶을 공유해온 관계의 끈끈함만으로도 지옥 바닥까지는 내려가지 않을 분별력을 지킬 수 있는 법이다.
이혼 분쟁을 다룬다기에는, 영화는 이미 무게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찰리는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러하듯 다소간 이기적인 면모가 있고, 이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육아와 경력에서 니콜이 감내한 희생에 대한 감수성의 부족, 아마 그것이 이혼의 가장 큰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 아들 헨리는 이미 엄마 편이다. 엄마의 양육방식이 더 맘에 들고, LA에서 사귄 친구가 더 좋다. 반면 찰리는 전형적인 뉴욕의 예술가 타입이라, 아들을 다루는 방식도 엄마와는 다르다. 혼자 잠을 자게 하고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 아마 뉴요커답게 일찌감치 독립심을 심어주려는 것이었겠지. 그 방법이 꼭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의 선택을 받을 만한 방법은 아니다.
찰리는 처음부터 지는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나는 찰리에 대해서도 얼마간 변명을 해주고 싶다. 이기적이라고 얘기했지만, 찰리는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훌륭한 사람이다. 재능이 있고, 자기만의 철학이 있다. 아들 양육 문제에서만 이견이 있을 뿐, 대부분의 재산을 기꺼이 양보할 만큼 관대하며, 극단에서도 존중받는 리더이다. 아내의 희생에 무심하다고 하지만, 아내에게 소소한 문제가 발생하면 (심지어 감정이 상하는 이혼소송 중이더라도) 기꺼이 손길을 내미는 섬세한 사람이기도 하다. 아이는 자라는 동안, 아빠가 악역을 무릅쓰고 실행하려 했던 교육의 덕을 더 크게 볼 수도 있다. 먼저 변호사를 고용하고 소송전을 개시한 것도 니콜이다. 찰리는 그에 따른 반응의 형태로 상황에 이끌려 들어오고, 격화된 감정 소모 끝에 (별수 없었을 수도 있지만) 결국 주장을 굽히는 것도 찰리 쪽이다.
이 영화는 편 가르기를 하는 영화가 아니다. 주고받음이 냉혹하기 짝이 없는 변호사들의 세계에 휘말려 들었다가 빠져나온 두 사람은, 이제 완전한 남이 되어 각자의 길을 가게 되지만, 아이를 매개로 관계를 계속 이어간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도대체 그 모든 감정 소모와 이혼의 저급한 측면을 겪은 이유가 뭐였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양보와 공감의 단계에 서 있다. 그들의 지난날을 반추해보게 되는 감상적인 라스트신도 있다. 이 궁극적인 화해의 순간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들의 결혼 생활이 무의미하게 흩어지지 않고 삶의 한 과정으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혼 과정의 지리멸렬함 따위를 읊조리거나, 이혼도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혼 과정을 그린 영화이면서도 ‘결혼’에 방점을 둔 것처럼, 때로 삶의 리듬은 깨어질 수도 있지만 오래 함께해온 관계의 아름다움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팽팽한 랠리처럼 주고받는 생생한 대사들과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두 배우의 엄청난 연기로 러닝타임을 밀도 있게 채우면서 말이다.
영화 말미의 감상적인 장면들 덕분에, 우리는 이 깨어진 가족이 그래도 평생의 친구로 지낼 것이며, 헨리는 좋은 부모 아래에서 잘 자라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거면 충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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