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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이라기에는 좀 그렇지만

소통의 미학, <두 교황>

페르난두 메이렐리스, <두 교황>

나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라서, 교황이라는 제도 자체에는 특별한 감응은 없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던 장면 때문에 솔직히 한 인간으로서 그에게 반했다. 시대의 현안인 양극화와 빈부 갈등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도 존중받을 만한 글로벌리더 중 하나라는 생각은 한다. 물론 그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 주로 과거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에 대해 취했던 모호한 태도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영화에서도 그 부분이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그의 회개가 진심이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모든 것이 관례대로 돌아갔다면,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교황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자신도 추기경직을 내려놓으려고 했고, 베네딕토 16세와의 성향 차이를 보더라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도 그는 가톨릭의 명망 있는 추기경이라는 평판을 얻었겠지만, 지구 반대편에 사는 가톨릭 신자도 아닌 내가 알았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영화를 보니, 초유의 사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백 년 전에도 교황이 죽지 않고 사임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베네딕토 16세가 자진 사임이라는 선택을 내리면서 호르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었다.

 

넷플릭스 영화 <두 교황>은 보수적인 전임교황이 개혁적인 후임 교황에게 자리를 물려주는(콘클라베의 전통을 따르긴 하지만, 베네딕토가 자신이 사임할 경우, 호르헤가 유력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과정을 다룬 영화이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대목은, 그 승계의 과정이 상호이해와 소통을 바탕으로 진행된 것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성직자들의 성추행이라는 이슈가 부각되고 있었고, 그 일에 대한 대처가 미흡하여 베네딕토 16세가 비난을 받던 처지라는 사안은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교황이 추방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전통은 힘이 아주 센 법이니까. (베네딕토 16세가 교회 기득권 세력을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파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퇴를 통해 일련의 개혁조치의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라는 분석도 있는 듯하다.) 그런데도 그는 선택을 했고, 자신이 생각하는 교회의 이상향과는 다른 견해를 가진 호르헤에게 기꺼이 자리를 넘겨주었다.

 

베네딕토와 프란치스코는 모든 사안에 대해 해석의 방향이 다르다. 심지어 성추행을 자행한 사제들을 처리하는 문제에서도 베네딕토는 교회의 권위를, 프란치스코는 종교의 정의를 내세운다. 처음에는 각자의 입장이 너무나 확고해 보여서, 서로를 설득하는 것이 도무지 어렵게 여겨진다. 하지만 결국엔 서로를 얼마간 이해하게 된다. 마음을 열어 자신을 드러내고, 상대를 경청함으로써 그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성취해나간다.

 

프란치스코는 범생이 학자로 평생을 살아온 베네딕토에게 탱고와 축구의 재미를 가르쳐주면서, 베네딕토는 프란체스코가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라 여기는 군사정권 시절의 처신에 대해 들어줌으로써(그리고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들려줌으로써), 그렇게 로고스를 넘어선 파토스의 영역에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소통의 출발이 꼭 논리적 승리여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공감은 진정한 소통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두 종교지도자는 서로의 가치관의 논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고도, 지금 시대가 필요한 합의를 이루어낸다. 정치적 입장들 사이의 갈등이 더더욱 극단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이 도출한 합의와 상호이해의 바탕에는 교회의 정화와 미래에 대한 공통의 애정과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자면, 이 이야기가 감동적일 수 있는 데는 그 방향성도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보수주의자가 개혁주의자에게, 규율과 권위의 신봉자가 정의와 평등의 신봉자에게 자리를 넘겨준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 사례에서나, 영화의 서사에서나 감동한다. 그 반대였다면 사람들은 이만큼 감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정신에 역행하고, 현재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에 눈을 감는 처사가 되었을 테니까. 무작정 정치 지향이 다른 두 사람이 화해하거나 적당히 타협한다고 해서 이런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다. 가령, 프란치스코가 교황이 된 후에 보여준 행보에 미더움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전환의 역사를 영화로 그려내거나 감상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두 교황은 친구가 된다. 그 우정 덕분에 우리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장면을 보게 된다. 시스티나 성당에 딸린 별실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개관해버려서, 교황과 호르헤는 관광객이 가득한 시스티나 성당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사람들은 아직 프란치스코를 모르고, 베네딕토 16세는 현직 교황이므로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린다. 이제 곧 퇴직할 교황이 사람들의 애정과 존경을 직접 대면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아마 학구적이고 비사교적인 교황으로서는 흔치 않은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걸 흐뭇하게,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프란치스코가 있다.

 

두 배우의 엄청난 열연은, 보는 이의 지향이 어디에 있든, 그들이 맡은 캐릭터에게 공평한 지분을 할당해준다. 영화에는 이야기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유머들도 있다. 하필이면 독일과 아르헨티나, 두 축구 강국 출신이라는 점은 자연스럽게 2014년 월드컵 결승전을 끌어들인다. 독일식 유머를 하고, 그게 유머냐고 묻는 프란체스코에게 베네딕트는 독일에서는 유머가 굳이 웃길 필요는 없다고 대답한다.

 

나는 중도라는 것이 개인의 인격적 덕목으로서는 훌륭하지만, 사회적 가치로서는 그다지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부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고민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쓰는 용례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극단으로 치닫는 것 역시 아니라고 본다. 대화를 아예 거부하거나 소통이 되지 않으면, 합의라는 것이 의미를 발휘하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우리는 극단에 이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비록 방향은 다르더라도) 애정의 부재를 자주 목격하곤 한다. 부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보수와 진보가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방법은 달라도,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공통의 목표에 몇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사람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밑도 끝도 없이 장외로 나가 시끄러운 소음을 내뱉는 것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