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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이라기에도 좀 궁색하지만

데이비드 린치와 그의 영화들에 대한 코멘터리, <꿈의 방>

데이비드 린치, 크리스틴 맥켄나 지음, 윤철희 옮김, <꿈의 방>, 그책

의도한 건 아닌데, 뭔가가 타이밍이 딱 맞았다. <트윈 픽스>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는데, 마침맞게 데이비드 린치의 자서전 <꿈의 방>이 나온 셈인데, 적은 가격도 아니고 빽빽한 글씨와 분량도 많아서 살짝 망설이긴 했지만, 이미 린치의 세계에 매혹당한 상태였으므로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한 달 반쯤 느긋하게 읽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척 좋았다. 린치가 만든 영화들에 대한 세세한 해석이나 분석이 담긴 책은 아니지만, 감독의 예술관과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해 본인 자신의 견해는 물론 다채로운 주변 목소리들까지 들을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마침 그의 작품을 보면서 읽으니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여러 에피소드와 증언들을 통해 린치 감독에게 인간적으로 매료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물론, 상당한 영감도 얻을 수 있었다. 어떤 측면으로 보나 데이비드 린치는 영적인 사람이고, 타고난 예술가니까.

 

책은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우선 공저자인 저널리스트 크리스틴 맥켄나가 데이비드 린치의 주변 인물들을 취재해서 들려준다. 유년 시절과 (미술학도였던) 학창시절을 다룬 후부터는 주로 그의 영화 제작과 관련해 챕터들을 구성했다. 크리스티나가 취재를 통해 비교적 객관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면, 그녀가 쓴 글을 보고 데이비드 린치가 해당 시절에 대한 자신의 시각으로 다시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대부분 일치하긴 하지만, 종종은 자신은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아예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대목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내용이 반복되기 때문에 다소 지루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같은 현상에 대한 다채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관전의 재미가 있다. 특히 각 영화의 출연진과 스태프와 제작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린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한 다음, 린치 감독이 그들과 일하면서 발휘한 창조적 비전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작품 감상에 적잖은 도움이 된다.

 

내 경우, <트윈 픽스> 시즌 2를 한참 보던 중에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던 중에 <트윈 픽스> 세 번째 시즌을 보았기 때문에, 관련 챕터를 보고 싶어서라도 열심히 읽었다. (순서를 미리 건너뛰고 싶지는 않았고, <트윈 픽스> 세 번째 시즌이 마지막 챕터여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영화와 함께 읽으니 더 좋았다. 책을 읽고 확 보고 싶어져서 <블루 벨벳><스트레이트 스토리>를 보기도 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로스트 하이웨이>도 무척 보고 싶었지만, 전자는 이미 두 번이나 보았고 책을 읽을 때는 <트윈 픽스>를 달리는 와중이었으므로, 목록에만 올려두었다. 영화와 함께 보면 당연히 더 좋겠지만, 영화를 보지 않고 읽은 부분들도 그 영화가 어떨지 흥미 유발이 되어서 꼭 봐야지 싶더라고.

 

책을 통해 본 린치는 좋은 사람이었다. 난봉꾼은 아니지만, 가정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확실히 아니어서 결혼은 네 번이나 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감정에 상당히 솔직한 사람인 것 같은데, 동시에 전형적인 예술가 타입이라서 일을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는 전처들이 좀 안타깝기도 했는데, 사귈 때부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두어서 그런지, 헤어지고 나서도 다들 린치와 좋은 관계인 듯했다. 그와 함께 작업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냥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크루가 형성되는 느낌이다.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매력이 철철 넘친다. 촬영방식의 면면도 생생하게 볼 수 있는데,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을 보자면, 정말로 그의 영화를 깨알같이 분석하는 게 의미가 있는 짓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는 (미술에 가까운) 예술을 하고, 우리는 그가 내놓은 작품을 미술이나 음악을 감상하듯 온몸으로 감응하는 것, 그것이 최선의 관람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는 영감의 원천, 관계의 원천으로 명상을 자주 거론하는데, 그런 덕분에 적잖은 실패, 가령 <트윈 픽스> 영화판을 비롯해 흥행이나 비평에서 쓰라린 아픔을 준 경험에서도 거뜬히 일어선다. “누군가가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에요. 뭔가 다른 걸 생각해내면 되죠. 나는 그런 방식을 좋아해요.” . 멋지잖아. 그 자신이 굉장히 영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말들도 툭툭 무심히 잘 던진다. 세상 만물의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영성이 풍부한 사람의 영화는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주변 사람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한다. “데이비드는 음울한 영화를 만드는 법에 대한 관례를 깨버린 셈이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음울한 영역에 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에는 초월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냈습니다. 그는 관객을 추락시킬 무시무시한 구멍을 만들어냈습니다. 평범한 상황에서라면 관객들은 그 추락에 엄청나게 겁을 집어먹겠지만, 그의 작품 밑바닥에는 어떤 평화로운 분위기가 깔려 있습니다.” 꽤 정확한 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울하지만 초월적이고, 그러면서도 그 속에는 어떤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영화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을 들여다보면 딱 그렇다.

꿈의 방
국내도서
저자 : 데이빗 린치(David Lynch),크리스틴 맥켄나(Kristine Mckenna) / 윤철희역
출판 : (주)그책 201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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